어린이날을 만든 것에 큰 공헌을 한 방정환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방정환
방정환은 1899년 11월 9일 출생하였고 1931년 7월 23일 사망하였습니다. 상인집안으로 경제적으로 풍족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1907년 갑작스럽게 몰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890년 이후 명성황후의 시해, 아관파천 등 불안한 국내외 정세로 왕실과 사업을 했던 그의 집안은 거듭되는 부친의 사업실패로 형편이 어려워졌습니다. 이후 어렸던 방정환은 배고픔과 함께 힘든 시기를 보냈습니다.
방정환의 인생이 달라지기 시작한 건 1917년 천도교 3대 교주 손병희의 딸과 결혼 후부터입니다. 토지조사국 사자생이라는 신분을 벗어나 천도교에서 운영하던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해 공부를 계속하였습니다.
유광렬, 이중각 등과 경성청년구락부를 결성, 1919년에 <신청년>이라는 잡지를 만들었습니다.
경성청년구락부는 비밀클럽이었는데 민족운동에 뜻을 둔 18, 19세의 소년들로 이루어졌습니다. 그 후 방전환은 '북극성'이란 필명으로 번역가가 되어 자신의 재능과 꿈을 키워 나갔습니다.
1923년 3월 16일 도쿄 하숙집에서 색동회(어린이 운동단체) 창립을 위한 모임을 가졌습니다. 도쿄에서 편집한 국내 최초의 어린이 잡지 <어린이>를 3월 20일 개벽사에서 창간했습니다.
색동회는 3월 30일 창립, 5월 1일 서울 시내 소년단체들의 연합조직 '조선소년운동협회' 주최로 '어린이날' 행사가 크게 치러졌습니다. 이 날은 천도교소년회의 창립일이기도 했습니다.
1922년 5월 1일 우리나라 최초의 어린이날로 제정할 것을 선창 되었고 그다음 해 1923년 5월 1일 색동회 발대식과 어린이날 기념식이 최초로 열었습니다. 1928년 경찰의 탄압을 받던 메이데이 날과 겹쳐 이를 피하기 위해 해마다 5월 첫 일요일로 변경해 행사를 진행하였습니다.
소파 방정환을 중심으로 조직된 우리나라 최초 어린이 운동 단체 색동회는 미래의 주인공이 될 소년 소녀들을 씩씩하고 참되고 서로 사랑하며 도와 가도록 이끌고자 '어린이'라는 새로운 낱말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어린이들의 민족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참고로 어린이의 어원은 '어리다'로 아직 깨우치지 못하다란 뜻입니다. 훈민정음에 '어린 백성'이란 말이 나오는데 '아직 깨우치지 못한 백성'이란 뜻을 담고 있다고 해요. 17세기 '어리다'에 인칭대명사 '이'가 결합해 '어린이'로 쓰기 시작했고 깨우치지 못하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럼 왜 소파 방정환이 '어린이'란 말을 만들었다고 할까요?
그건 개화기 이후 일본에서 들어온 '아동' '소년'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소파 방정환이 이 1921년 어린아이의 높인 말로 '어린이'를 공식화했다고 합니다.
1931년부터 1936년까지 일제의 탄압으로 1937년에 금지되었고 동시에 소년단체도 강제 해산을 당했습니다.
어린이날의 부활
어린이날은 해방 이후 부활했습니다. 1946년 5월 5일로 공식 제정되었습니다. 이는 1946년의 첫 일요일이 5월 5일이었고 해마다 달라지는 날짜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5월 5일로 고정시킨 것입니다.
해방 후 휘문중학교에서 첫 어린이날 행사가 거행되었습니다. 그 후 1975년 법정공휴일로 지정되었습니다.
방정환의 사망
1931년 7월 17일 신장염과 고혈압으로 쓰러진 후 7월 23일 3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도 동화집필과 구연동화에 몰두한 어린이들의 대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어린이를 두고 가니 잘 부탁하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호인 '소파'가 지닌 의미는 일본의 아동문학자인 이와야 사자나미의 호를 본떠서 지었다는 이야기가 있고 방정환과 함께 어린이운동을 전개한 '김기전'의 호인 '소춘'과 연관 지어 천도교 사상을 담아내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방정환이 환한 미소를 지으면 아내에게 김기전과 함께 호를 지었다고 김기전은 소춘, 자신은 작은 물결이라는 뜻인 소파를 지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https://popo-rich.tistory.com/186
어린이날 동화 듣기
https://www.youtube.com/watch?v=DfmyRFbxPVg
댓글